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972 뮌헨 올림픽 (문단 편집) == [[대한민국 올림픽 대표팀|대한민국 선수단]] == * 대한민국 참가 현황 : 임원 22명, 선수 46명 참가[* [[https://gsic.sports.or.kr/com/cop/game/game_info.do?partCode=1&gameCode=20|출처 국제스포츠정보센터]]] * '''레슬링''': [[초슈 리키|곽광웅]], [[김영준(레슬링)|김영준]], 안재원, 안천영 * '''배구''': 남자([[강만수(배구)|강만수]], 김건봉, 김귀환, 김충한, [[박기원]], [[이선구]], 이용관, 이인, 이춘표, 정동기, 진절탁, 최종옥) 여자(김영자, 김은희, 유경화, 유정혜, 윤영내, 이경숙, 이경애, 이순복, 이인숙, 이정자, [[조혜정(배구)|조혜정]]) * '''복싱''': 고생근, 김태호, 박태식, 유종만, 이석운, 임재근 * '''사격''': 김남구, 김태석, 박도근, 박성태, 최충석 * '''수영''': [[조오련]] * '''역도''': 원신희 * '''유도''': 오승립, 장인권, 한성철 * '''육상''': [[백옥자]] * 대한민국 참가 성적 : 은메달 1개 획득. 종합순위 33위. * 은메달 : 유도(미들급) 오승립 본격적인 남북 대결이 시작된 올림픽. 국호 문제 때문에 이 올림픽부터 공식 참가한 [[북한]][* 하계 대회만 놓고 보았을 때는 처음이지만 동계는 1964년 대회에 첫 참가.]은 사격 소구경 복사종목에서 리호준이 세계 신기록까지 세우며 첫 금메달을 따냈다. --출전하자마자 금메달-- 전직 정무원 총리였던 [[강성산]]의 사위인 [[탈북자]] [[강명도]]에 따르면, 올림픽 후 귀국하자 사격을 취미로 즐기는 김정일의 직속 호위군관이 되었다고 한다. 수상 소감이 "원쑤의 심장을 겨누는 심정으로 쐈다."고 해서 파문을 일으키키도 했다.[* 북한 측 자료에는 "저는 과녁을 조선인민의 철천지 원쑤인 미국놈의 털가슴으로 보고 쏘았습니다." 라고 소개돼있다. 사실 살벌한 내용도 문제지만 이는 올림픽 정신에 위배되는 말이다. 이는 국내 뿐만 아니라 외신에서도 비판받았다. 이후 수상소감이 문제가 되자 북한사격연맹 임원이 IOC 부위원장 소련인 스미르노프와 각국 사격연맹 임원들에게 지지를 호소하여 미국사격연맹의 항의문 취소에 찬성하게 만들었고 예정 시간보다 5시간 늦게 금메달 시상식이 열렸다.] 북한은 첫 출전에서 금메달과 은메달 각각 한 개, 동메달 세 개를 따면서 종합 22위를 기록, 은메달 한 개를 따는데 그쳐 종합 33위[* 이 때 한국은 [[아르헨티나]], [[레바논]], [[멕시코]], [[몽골]], [[파키스탄]], [[튀니지]], [[튀르키예]]와 함께 공동 33위를 기록했다.]에 머물렀던 한국을 압도했다. 그나마 이 은메달도 일본에서 유도를 배웠던 [[재일교포]] [[오승립]]의 것이라서, 순수하게 한국에서 육성된 선수들은 메달을 전혀 따지 못했다. 복싱 라이트플라이급에서 은메달을 획득한 김우길 선수는 한국의 이석운 선수를 상대로 2라운드에서 '''4-1'''로 완승했다. 그리고 동메달을 딴 레슬링선수 김광형도 [[김영준(레슬링)|김영준]] 선수가 경기에서 진 터키 선수를 꺾고 동메달을 땄다. [[김용익]] 선수가 동메달을 딴 남자 유도 63kg에선 은메달이 비어 있는데 그 이유는 원래 은메달 수상자인 몽골 선수 바크베인 부야다가 경기가 끝난지 며칠 후 도핑 테스트에서 '''유도 선수로서는 최초로 아나볼릭 스테로이드 양성 반응'''이 나와 메달이 압수되었기 때문이다. 여자배구에서는 3,4위전에서 한국과 북한이 동메달을 놓고 경기를 펼쳤다. 결과는 북한의 3-0 완승. 북한의 주포인 김증복[* 기사에 따라서는 김정복으로 표기하는 경우도 있다. 발음이 비슷하고, 기자조차 북한 선수단과 접촉하기 힘들었던 시절이라서 그런 듯 보인다.]에게 털리면서 패한 것이었다. 패배를 믿을 수 없던 한국 선수단은 '''김증복이 남자라고 주장하면서 성 검사를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국내 신문 기사를 보면 요구해서 재검사를 했다는 기록만 나와있고 그 뒤 기록이 없는데, 북한의 메달이 박탈되지 않은 것을 보면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이 확실하다. 한 마디로 진 것을 인정할 수 없던 멘붕의 현장(...) 어쨌든 이 주장으로 패배의 책임은 모면했고, [[1976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따게 되어서 지금은 예전에 그런 해프닝이 있었지 정도로 기억되는 사건이다. 어쨌든 동계 올림픽의 첫 메달도 그렇고[* 북한은 [[1964 인스브루크 동계올림픽]]에서 스피드스케이팅 여자 3,000m에 출전한 한필화가 은메달을 따서 [[1992 알베르빌 동계올림픽]]에 가서야 메달을 딴 한국보다 28년이나 먼저 동계올림픽 메달을 땄다. 또한 북한의 이 메달은 유럽과 북미를 제외한 국가에서 출전한 선수가 따낸 두번째 동계올림픽 메달이기도 하다.(첫번째는 [[1956 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에서 일본의 알파인 스키 선수 이가야 치하루가 획득한 은메달.)이 이후로 북한은 28년동안 한동한 메달을 획득하지 못하다가, 92년 동계 올림픽에서 오랜만에 스피드 스케이팅에서 동메달 하나 달랑 추가하고 26년이 지난, 현재까지 메달을 획득하지 못하고 있다. 반대로 한국은 92년 첫 메달획득 이후로, 종합순위 10위권 안에도 몇차례 들어가면서 동계올림픽 기준으로 북미, 유럽을 제외한 지역에서 금메달 포함, 가장 많은 메달을 획득한 국가다. ], 하계 올림픽도 북한이 먼저 금메달을 따자[* FIFA 월드컵 본선 첫 승과 2라운드 진출도 북한이 대한민국보다 더 빠르고(북한 1966년, 대한민국 2002년)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서도 북한이 더 메달 획득이 빨랐고(그것도 금메달이다. 1999년 여자 마라톤 정성옥), 대한민국은 2019년에 2011년 대구 육상 선수권 대회에서 남자 경보 20km에서 4위를 차지했던 김현섭이 당시 대회 동메달리스트의 도핑 적발로 인해 뒤늦게 동메달로 승격하면서 간신히 사상 첫 육상선수권대회 메달을 얻었다.] 한국 정부는 작심하고 엘리트 스포츠를 키우기 시작한다. 특히 사격 부문에서는 북한의 첫 금메달에 자극을 받은 당시 대한사격협회 회장이자 청와대 경호실장이던 [[박종규]]가 박정희 당시 대통령에게 다시는 이런 일이 없겠다고 빈 후에 당시 대기업들의 협조를 받아 태릉에 사격장을 지었다. 이것이 한국 최초의 국제 규격 사격장인 태릉사격장이다. 이처럼 한국이 작심하고 키우기 시작한 뒤로는 한국이 북한에게 메달에서 뒤진 적이 없다. 그리고 이것은 현 한국 엘리트 스포츠의 시초가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